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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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불꼬불한 삶, 설렁탕과 인연…기존과 다른 설렁탕으로 손님 줄이어
전수창업 가게 50여개…“설렁탕은 진화, 마음에 드는 것 만들려”
설렁탕 전문점은 많다. 설렁탕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 가까이서 자주 보고, 자주 먹지만 설렁탕만큼 오해가 깊은 음식도 없다. 누구나 다 아는 설렁탕,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영호신촌설렁탕’ 대표 하영호 씨를 만났다. 1962년생, 55세. 설렁탕 전문점 운영 20년. 처음에는 유명 설렁탕 집에서 설렁탕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년간 올곧게 설렁탕을 스스로 배웠다. 하영호 씨에게 설렁탕 이야기를 듣는다.
'하영호신촌설렁탕'대표 하영호 씨. 서울 신사동에서 10년, 도곡동에서 10년의 세월을 접고 내년에는 반포 쪽으로 이사간다. 마음에 드는 설렁탕을 만들고 싶다.설렁탕과 선농단은 관계가 없다
설렁탕은 무엇인가? 좋은 설렁탕은 어떤 것인가? 설렁탕은 뼈 중심이다. 뼈 중에서도 사골이다. 사골은 짐승의 다리 부분이다. 그중 소, 돼지 등의 몸통 쪽으로 붙은 뼈가 사골이다. 굵다. 사골은 네 개가 ‘한 벌’이다.
대가리 뼈도 있다. 갈비뼈도 있다. 나머지는 전부 ‘잡뼈’로 본다. 잡뼈는 정식 명칭이 아니지만 흔히 부르는 이름이다. 예전 설렁탕에는 허드레고기로 여기는 부분들도 넣었다. 설렁탕 노포들은 지라 등 내장 부분 한 조각을 설렁탕에 넣는다. 원래 이렇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제는 양지 등을 넣는다. 굵은 사골과 잡뼈, 대가리 뼈 등을 넣고 푹 곤다. 얼마간의 살코기 국물을 더한다. 설렁탕이다.
“예전에 어느 임금님이 선농단에서 행사를 하시다가 비가 쏟아지자 모였던 사람들과 국을 끓여 드셨는데 그게 선농단, 설렁탕의 시작이다, 이런 이야기도 재미있잖아요.”
가게에 설렁탕이 선농단에서 시작되었다는 ‘옛날이야기’가 적혀 있다. “사실이 아닌 걸 알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하영호 대표가 웃었다. “사실이 아니지만,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라서 걸어 두었다”고 했다.
“설렁탕을 오랫동안 끓여본 사람들은 압니다. 결국 뼈 고는 작업이 설렁탕 만드는 작업의 대부분입니다. 그중에서도 ‘사골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고요. 비가 오는데 선농단에서 몇 시간동안 뼈를 고는 것은 불가능했겠지요.”
서울 도곡동 ‘하영호신촌설렁탕’ 본점. 이른바 ‘대박가게’다. 대박가게의 주인이면서 늘 국물을 직접 관리하는 이유를 물었다.
“저도 가끔 국물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국물 맛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엉뚱한 맛이 날 때 국물 만드는 이들은 “국물이 무너졌다”고 표현한다.
유명한 신촌의 ‘신촌설렁탕’에서 배웠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20년. 거의 매일 뼈와 고기를 만지고 국물을 곤다. 그런데도 ‘가끔’ 국물이 무너지는 일을 겪는다.
“조미료 없이 만들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10시간 이상 뼈를 고는데 그 과정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국물은 바로 무너집니다. 이때 조미료로 덮지요. 저희는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이걸 조정하려면 진땀이 납니다.”
꼬불꼬불 살아온 삶, 끝은 설렁탕 전문점?
하영호 대표는 경기도 여주 출신이다.
“정확하게는 화성 출신입니다. 여주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화성으로 갔고, 그곳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발안에서도 한참 바닷가 쪽으로 가야 하는 외진 곳이었습니다. 어머님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어머님은 경기여고 나오셔서 교편을 잡으셨던 분이었습니다. 아주 어릴 땐 몰랐는데 나이가 들어서 보니까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살아오면서 제일 깊이 영향을 주신 분은 어머님입니다.”
위로 열 살 위 형이 있었다. 불행히도 서울 유학 중이었던 형이 의료사고로 죽었다. 2남2녀였는데 갑자기 외동아들이 되었다.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다. 강퍅한 살림살이다. 집안은 구멍가게, 오락실 등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설렁탕 집을 내기 전까지 살아온 길은 늘 꼬불꼬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미아리 북공고에 진학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지만 대학 진학 무렵에는 욕심이 생겼다. 동일계 진학이 있던 시절이다. 운 좋게 연세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 82학번. 입학은 했지만 학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토목공학이 적성에 맞지도 않았다. 학교를 그만두었다. 두해 늦게 중앙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연대 다니다 중대 다니는 게 괜히 억울해서 또 한두 해를 허송세월했다.
“대학교 때 이미 자영업을 생각했습니다. 영어가 필요 없고, 학벌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게 결국 자영업이더라고요. 80년대 중반에 이미 프랜차이즈 공부를 했습니다.”
사회생활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스물다섯 살 무렵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부모 없는, 평범한 대학, 성적도 좋지 않고, 그나마 방위출신. 기업체 취업문을 여러 차례 두드렸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 입사한 것이 모 주간신문사. 광고 직으로 입사해서 1년 반을 다녔다. 그리고 옮긴 회사가 전자신문이었다.
20년 전, 18평 가게에서 시작, 이제 전수창업 가게만 50개
“오랫동안 외식업 준비는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요리학원을 다닐까 했더니 ‘장가 못 간다’고 누나가 말리더라고요. 당시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신혼 3개월 차, 하영호 대표가 “앞으로 식당을 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아내가 불쑥 친정으로 가버렸다. 번듯한 전자신문 직원인 줄 알고 결혼했더니 식당이라니.
“우여곡절 끝에 1998년 8월에 신사동에서 설렁탕 집 문을 열었습니다. 준비한 창업자금 4천만 원에 누나한테 돈을 빌리고, 은행에서 대출 받고, 어렵게 18평짜리 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쉽지 않은 길. 매출이 예상에 미치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 될 때, 직접 설렁탕 배달을 했다. 설렁탕을 좁은 가게에서 직접 끓이고 직접 담근 김치를 배달하는 경우가 없었으니 다행히 반응은 좋았다. 전단지도 주인이 직접 뿌렸다.
5년 후, 인근의 50평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5년.
지금 ‘하영호신촌설렁탕’ 이름을 달거나 하영호 대표에게 설렁탕을 배워서 설렁탕 전문점을 낸 가게가 약 50개를 넘긴다. 남쪽의 몇몇 도시에서도 ‘하영호신촌설렁탕’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고 있다. 프랜차이즈와는 다르다. 이른바 ‘전수창업(傳受創業)’이다. 핵심적인 노하우를 알려주고 가게의 창업 과정을 도와주는 정도다. 때로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제일 믿음직한 주방직원을 보내주기도 한다.
조미료 없는 설렁탕, 그리고 설렁탕의 ‘또 다른 진화’
좋은 설렁탕은 우선 뼈가 좋아야 한다. 사골이 물론 가장 좋다. 피빼기도 중요하다. 뼈를 고는 과정은 그 다음이다.
“보통 오후 5, 6시 무렵에 물에 뼈를 담가둡니다. 다음날 출근해서 뼈를 건져내지요. 조금씩 방법이 다릅니다. 여름철에는 물을 조금씩 흐르게 만들지요. 겨울에는 너무 차가우니까 또 다르게 하고요. 핏물 빼기는 뼈 굵기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오랫동안 해보면 대략 손에 익지요. 20년을 해도 가끔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년에는 반포 언저리로 이사를 할 예정이다.“제대로 설렁탕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도곡동에 와서 보람은 있었습니다. 조미료 없는 설렁탕.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손님들이 알아 주셨으니까 가능했습니다.”
담백한 맛. 조미료 없이 끓이는 설렁탕. 하영호 대표가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설렁탕에 현미국수도 넣어보고, 쌀국수도 넣어봤다. 소금도 직접 볶아서 사용하고 깍두기 등도 직접 만들어 내놓는다. 다행히 아내가 만든 깍두기가 인기가 있다.
이제 원하는 음식, 스스로의 마음에 드는 설렁탕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오랫동안 가졌던 소망이다.
“내년 이사 갈 곳이 조금 더 넓습니다. 주방을 크게 하고 국산 재료만 사용해서 마음에 드는 설렁탕을 내놓고 싶습니다.”
설렁탕은 몽골어 ‘슈루’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역시 정확치는 않다. 분명한 것은 조선말기, 일제강점기 초기 무렵에 설렁탕이 널리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전부터 먹었지만 이름 없었던 음식.
설렁탕이 버젓한 이름을 가지고 우리 곁으로 온 것은 이제 100년 남짓이다. 완성된 음식이 아니라 이제 막 진화, 발전하고 있는 음식이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을 보면 소 대가리 뼈 위주로 끓인 설렁탕도 있었다. 당시에는 각각 다른 재료를 구해, 각자의 방식으로 맛있는 국물을 만들었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에도 설렁탕은 등장한다. 인력거꾼이 가난한 아내를 위해 마련한 음식이다. 젊은 룸펜 부부가 하루 두 끼 설렁탕을 배달시켜 먹고 밥을 해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간편식이다. 대단한 레시피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설렁탕은 끊임없이 진화, 발전한다. 뼈 고는 방법, 피 빼기 방법 등 하나, 둘 제대로 된 레시피가 등장한다.
“100도 이상으로 고면 기름도 엄청나게 나옵니다. 이걸 다 걷어내면 그때야 맑은 물이 나옵니다. 5-7시간 정도 고면 골수가 뽀얗게 나오지요. 뼈의 상태나 굵기, 두께에 따라 다르고 물 끓이는 온도, 기온, 습도 등에 따라 방법은 모두 다릅니다.”
‘뼈 섞기’도 있다. 생 뼈와 한번 끓여낸 뼈, 그리고 두 번 끓여낸 뼈. 실제 설렁탕을 끓일 때 이 세 가지 뼈를 모두 사용한다. 잘 끓인 설렁탕 국물 세 종류와 고기 곤 국물을 섞는다. 이 배합 비율도 중요하다.
뼛가루가 바닥에 가라앉으면 뼈 부스러기는 탄다. 국물에서는 냄새가 난다. 이것도 피해야 한다.
“뼈의 도가니 부분이 콜라겐 덩어리죠. 기름은 걷어내되 콜라겐은 적절하게 살려야 합니다. 이 작업도 중요합니다.”
신사동에서 도곡동으로 그리고 다시 반포로. 하영호 대표는 설렁탕의 ‘변화와 진화’를 꿈꾸고 있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이야기가 있는 설렁탕 맛집 4곳]
이문설렁탕
설렁탕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외식업체 중 최고最古의 노포다. 업력이 100년을 훌쩍 넘겼다. 마나(지라)수육이 있고, 설렁탕에도 지라를 한 조각씩 넣어준다. 노포의 특징.
마포양지설렁탕
설렁탕에 양지 살을 넣었다. 이름이 ‘양지설렁탕’이다. 고기 곤 국물이 곰탕, 뼈 곤 국물이 설렁탕이라는 원칙(?)을 무너뜨렸다. 업력 30년을 넘겼다.
마포옥
마포 뿐만 아니라 서울 전체에서도 노포에 속한다. 60년 전통, 2대 전승이다. 간판에 한우양지설렁탕이라고 써붙였다. 양지, 우삼겹, 차돌 등으로 만든 설렁탕이 있다.
강릉가마솥설렁탕
강릉 시내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설렁탕 전문점. 가게 입구에 큰 가마솥을 걸고 설렁탕을 곤다. 인근의 도축장에서 고기, 뼈를 구해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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